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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 살기

250922

by MJINAUS 2022. 9. 24.

요즘 잠을 잘 못자니 얼굴이 붓고 머리도 멍하다. 일이 잘못될 경우 잃을 게 많아서일까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두 손에 힘을 풀 수가 없다. 인생 전체를 봤을 때 그렇게 대단한 걸 쥐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그걸 인정하기에는 정말 뭣도 아닌 인생인거 같아 아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혼란의 연속인 상황의 중심에 있다보면 내 기준의 상식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내 의지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튜브에 매달려 흐르는 강물에 둥둥 떠내려 가듯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할 수 있는 건 간절한 기도밖에 없기에 그나마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아는 건 다행인 듯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사회에 첫발을 디디고 잘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와 꿈꿔왔던 비지니스를 운영하고 이민을 결심하고 해외에 나오는 그 과정 사이사이에 아 이렇게 배우고 또 성장하는 구나 하는 순간마다 느껴왔던 기분이다. 누군가 저 구석에서 방향잃고 허우적 거리는 나를 인형뽑기 집게 같은 걸로 집어다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살포시 옮겨 놓아주는 것 같다. 혹은 또 그래주길 은근히 기대한다. 어른들이 난 좋은 사주팔자를 타고 났다 했으니까.

케이마트 구경가서 간만에 테스트용 체중계에 올라서니 살이 많이 빠진 걸 알게 됐다. 헤드셰프와 몇몇 시니어 셰프들이 나간 이후에 정상 인력의 50%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100년이 넘은, 동네의 랜드마크의 명성이 무색하게 심각한 경영 위기가 찾아왔다. 모든 동력을 잃고 수직낙하하는 비행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남은 직원들은 생계를 위해 일자리 보전을 걱정하는데 나의 책임은 어디까지 일까. 권한은 없고 책임만 주어진 상황에 또 한번 참고 버티기에는 다른 직원들의 상황이 너무 비참해진다. 지난 1년 갖가지 부상에 시달리며 버텨온 희생에 대한 리턴은 지금까지보다 두세배 더 힘들게 남은 연말을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다. 리턴이 아니라 가혹한 체벌과 같다. 어느 직원은 자신들의 비참함을 하소연하며 눈물도 흘린다. 양손목에 허리까지 아파 물건을 잘 들지 못하게 된 직원이다.

랩탑과 아이패드를 열어 갖고 있는 모든 데이터를 총동원해 새로 온 매니저를 설득하는 중이다. 2017년부터 코로나 직전까지, 그리고 코로나 이후의 매출과 인건비, 푸드코스팅 비교, 현재 인력부족의 근거와 헤드셰프의 부재가 불러올 우려사항들을 설명해도 데이터를 읽지 못하는 아니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매니저. 이정도 규모의 호텔을 관리해 본 적이 없으니 어느정도의 인력이 필요한지 각종 비용의 안정적인 레벨은 어느정도 인지, 일반적인 리소스와는 달리 감정까지 생각해야하는 다국적 인적자원의 컨트롤은 -결국엔 인건비 절감의 한 차원이지만- 어떻게 해야하는지 도무지 아무 계획과 경험과 데이터가 없는 사람이라 의미없는 질문과 답변만 오가는 중이다. 회의 한번 할때마다 내 얼굴의 밝기와 명암 수치가 낮아진다.

미생에서 오과장이 박과장 요르단 사건을 파헤칠 때 김부장은 이런 말을 한다. 정황이 그렇다면 대부분 맞아. 뒤따르는 각자의 사정이 추가될 뿐이지. 회사 매각설은 여전히 루머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수두룩한 정황들이 인과관계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다. 윗선의 속내를 아래에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그 윗선이라는 오너와 새로 온 매니저가 상황파악 못하고 바보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건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에서 가진자의 이기심을 모두 끌어와 앞뒤사정을 맞추려고 해도 맞지 않는 정황들이 보이는 이유는 분명 둘 중 하나다. 그들의 욕심이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거나 혹은 감각 잃은 헛똑똑이들이거나.

생각을 깊게 하는 안좋은 습관 탓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지만 이젠 몸이 받아주지 못해서 그것도 안된다. 죄와 벌, 안나까레니나 그리고 부활로 올해 초 여섯달 정도를 잘 버텼었는데 시간 보내기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도 뭔가 버틸게 필요해서 알라딘 ebook의 무료책자를 다 읽고, 얼마 전 읽은 단편집에서 신유진 작가의 문체가 맘에 들어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비자 프로세싱이 끝나기 전에 다 읽어버릴까봐 걱정이다. 그럼 또 시간을 버틸 뭔가를 찾아야 하니까.

해외여행 당분간 못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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