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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 살기

22052021 Me before You

by MJINAUS 2021. 6. 28.

일본 교환학생 시절 별과생으로 왔던 98학번 선배와의 인연이 꽤 깊다. 그 선배가 전공한 특수체육학과는 장애인 체육과 관련한 학과인데 졸업 후에 지역 장애인 체육회와 협업하여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일을 함께 도운적이 있다. 문체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자전거를 만드는 사업이었는데 자전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발을 굴려서 가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하반신 마비 장애인을 위한 자전거는 손으로 굴려가는 방식을 택한다. 호주에 오기 전 짧은 기간동안 대전의 한 공장에서 약 세 달정도 기계도 다루고 잔심부름도 했다. 당시 그 선배의 동료 역시 장애인이었는데 당시엔 이해하기 힘은 한가지가 있었다.

그 선배는 장애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얘기하면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애인의 활동을 도와줄 기계를 개발하고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장애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게 좀 아이러니 했지만 장애인과 함께 일해보지 않은 나는 내가 모르는 고충이 있겠지 하면서 넘겼다. 혹 애증의 관계같은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만 했었다. 언젠가 왜 그러냐고 여쭤봤을 때 들려온 답변은, 그들은 너무 이기적이다. 라는 말이었다. 아마 윌과 같은 AB에 대한 늘 보이지 않는 장막과 고슴도치 가시같은 경계심에 처음엔 상처를 받고 시간이 갈수록, 또는 함께 일할수록 그것에 이골이 나고 아울러 감정의 골이 깊어진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윌과 루이자도 처음엔 그와 같았지만 결국엔 온 세상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오직 그들 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짧고도 긴 6개월안에 깨달았다. 그들이 그렇게 연결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루이자가 장애인을 대하고 돕는 것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혹 그런 재능이 있었다고 한들 윌의 지배적인 성향과 감정을 꼬는 기분 나쁜 농담에 지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 중 가장 긴시간을 함께 나눈 유일한 둘이었고, 죽도록 증오하고 멀어지거나 반대로 세상 가장 가까운 두사람이 되는 것 중 하나밖에 될 수 없는, 그것도 자의가 아닌 계약에 의한 타의에 의한 운명이었다.

난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드라마틱함이 그들의 환경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윌은 그저 잘사는 부자였고 루이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의 젊은 여자다. 물론 소설에서 다루는 윌은 엄청난 부자이지만 그렇다고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보기에는 루이자의 삶이 그렇게 비참해보이진 않았다. 내 주변에도 실제 윌만큼은 아니더라도 돈 많은 부자가 있고 나를 비롯한 많은 내 주변인들은 루이자와 같이 그저 평범한 가정에 속해있다. 다른 인생이지 다른 계급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윌이 장애가 없었다고 해도 난 그들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만큼 초반 스토리에서 윌의 장애가 그 둘 사이에 큰 벽의 역할(?)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그의 장애가 소설의 결말을 내는 데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재였지만 적어도 그들이 만들어가는 그 과정에서 만큼은 윌의 장애는 벽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가슴을 세게 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장애인을 대한다는 것. 그건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 그게 남자든 여자든 몇 년 만에 전화해도 바로 어제 만나서 수다떨도 놀다가 맥주 한 잔 마시고 헤어졌던 친구를 대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선배가 느낀 장애인의 이기심은 진짜 이기심이 맞을수도 혹은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장애인'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저 한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본다면 여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내 주변에 만난지 얼마 안되는 지인이 있고 서로에 대해 알고있는 것보다 알아가야 할 것이 훨씬 많은 그런 관계일때, 그리고 그 관계가 자의든 타의든 진행중일 때 그 사람과 가까워지려고 가식으로 무장하면 그 관계는 진실되지 못한 그림으로 좋지 않은 결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불편하던지, 아님 상대가 거리를 두든지. 우리들 모두 흔히 겪지 않던가.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관계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내 자아를 확실히 갖고, 상대를 대함에 있어 늘 당당하고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균형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 안에서 둘이 나눌 수 있는 공통점은 밝게 부각될 것이며 맞지 않는 부분은 배려로 감싸지게 되지 않을까? 윌과 루이자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윌의 엄마는 늘 초조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윌의 아버지는 소설에서 큰 비중이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아들의 상황보다 자신의 삶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은 윌의 동생도 마찬가지. 그냥 우리 삶에서 흔하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끔 연락이나 하는 관계나 혹은 이미 끊어진 관계로 흘러 지나간 주변인들의 모습, 혹은 나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오히려 현재 일부러 거리를 두게 된 그런 관계의 느낌을 가족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열릴래야 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회복 불가능한 장애까지 그의 지옥같은 일상을 온통 휘감고 있었기에..

루이자의 노력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의 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비록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카페에서 일하는 6년동안 작은 것에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자신의 처지에도 늘 밝은 그 천성은 아마도 자신이 행복했던 만큼 많은 손님들을 행복하게 해줬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었던 것은 성 미로속에서 그녀가 겪은 불행한 사건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녀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윌이 알려주기 이전에 자생능력으로 자가치유할 수 있을만큼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다. 가끔 모자라기도 하고 카트리나가 봤을 때 참 미련하고 부족한 언니지만, 그렇지만 참 사람냄새나고 밝고 잠재력 가득하고 행복이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위스의 공항에 도착해 트레일러 부인이 예약해 둔 호텔에 들어가 극도의 심리적 불안감과 자괴감때문에 루이자가 구토를 할 때 나 역시 속이 메스꺼울 정도의 불안을 느꼈다. 이 소설이 가진 힘,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한 심적 고통의 묘사는 시종일관 루이자에 이입되어 독자로 하여금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기분이고 또 그런 벼랑 끝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든다.

장애인을 대하는 어떤 특별한 정해진 공식이 있을 수 없다. 우리 사회 안에서 그들이 겪는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과 언제든 마주칠 수 있다. 그때마다 그 공식을 꺼내어 이럴 땐 이렇게 해야지 혹 저럴 땐 저렇게.. 이게 가능할 순 없다. 장애인은 일상생활에 제약이 많은 사회적 약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그들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젠가 도움이 필요한 그들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하고 또 부담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루이자와 같은 순수함, 천성으로부터 비롯된 듯한 배려와 친근함을 갖추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비단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늘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각기 다른 모습의 상처를 안고 있는 타인을 위해서도 필요한 모습일 듯 싶다. 소홀할 수 있는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잠시 스쳐가는 직장 동료, 모임 등에서 만날 수 있는 흔한 관계도 예외는 아닐것이다.

루가 잠재력을 발산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윌의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나야지만 가능했었다. 이것만큼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가혹한 엔딩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주는 메세지를 앞으로도 몇번이고 곱씹어 보지 않을수가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현명해 질 수없다. 그래서 인간이고 그래서 더욱 평소에 마음을 가다듬고 늘 자신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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