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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 살기

04032021 카라반 라이프. 언젠가 꼭...

by MJINAUS 2021. 6. 28.

가을로 접어들며 날이 선선해져 그런가 기분이 들뜨고 중심을 못잡고 자꾸만 한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요즘들어 부쩍 지역이동을 해볼까 생각이 드는데 이게 일시적인 충동인지 아니면 삶의 색깔을 또 한 번 바꿀때가 됐다는 본능적인 신호인지 잘 모르겠다.

업장의 매출 사정은 좋아지고 있다. 그러나 코비드 이전 약 20명의 셰프로 돌아가며 로스터가 운영되던 때와는 달리 절반도 안되는 9명의 셰프로 2020년 부터 현재까지 키친핸드도 없이 버티고 있는 이 주방 상황은 말그대로 지옥이다. 헤드오피스의 우유부단함에 늘 두통에 시달리는 헤드셰프는 이미 2020년 초에 시작했어야 했을 새 매뉴를 얼마 전에야 컨펌을 받았고 내 휴가 복귀에 맞춰 런칭, 두 세사람의 몫을 하며 고군분투 하지만 아직까지도 접시를 닦는 그 모습이 참 안쓰럽기도 하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고용유지의 감사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나와서 자신의 한계만 드러내며 시간만 때우다 가는 아주 이기적인 풀타임 셰프들 두명의 R들이다. 캐주얼로 일하는 녀석들만 캐주얼 로딩 그거 조금 더 받는다고 불안정한 시프트 안에서 죽도록 일하는 게 이렇게 불공평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늘 항상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중대한 시기의 내 결정에는 종종 주변의 만류가 있었다. 만류는 늘 조언과 충고에서 그쳤고 내 고집은 '결과로 말하리라!'는, 말 그대로 말이 안통하는 똥고집과 함께 계속되어 왔다.

남들보다 늦게 대학을 진학할 때도 그랬고 30세 이전에 사업한답시고 대학 졸업 후 취직한 회사를 일년 반만에 박차고 나올때도 그랬고 나이 서른에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간다고 할때도 그랬다. 모든 과정엔 만류가 있었고 그렇게 난 내 인생의 한 줄 한 줄을 지우개도 없이 직접 주욱 써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호주에 온 지 7년이 지났다.

한국에서 호주로 온다는 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걸 의미한다. 극소수의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다. 과거에 내가 뭘 했든 여기서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말그대로 새로운 시작이다. OS없는 데스크탑 본체만 덩그러니 있는 것과 같다. 나름 열심히 일궈왔고 옆에선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지만 자꾸 움직이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포기가 아니고 방향만 조금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밑그림은 같지만 정해진 것과 다른 색의 색연필을 들고 칠하는 것이다. 물론 따르고 싶지 않은 그 정해진 색 역시 언젠가 내가 정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내가 정하고 내가 바꾸는 건데 왜 뭔가 걸리는게 있을까.

조언, 충고, 반대의견은 늘 있다. 물론 감사한 일이다. 주변의 만류가 없을 때는 내 마음 한켠에서 내 자신으로부터 들려오는 만류의 목소리가 있다. 어찌됐던 100%이거다 라는 것은 이젠 없다. 과거와 달리 조금 더 신중해지고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비단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후의 결과를 혼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닌 와이프의 인생에도 좋든 안좋든 결과에 따른 영향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으로 일을 무조건 어떻게든 되게끔 만들어내는 성격이 가진 큰 단점은 결과가 좋으면 좋은대로 혹은 나쁜대로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점점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 소모가 따르는데 만약 그 정도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는걸까 라는 의구심을 해소할 만한 실험은 허락되지 않는다. 일단 일을 벌이거나 목표로 하는 일이 생긴다면(항상 그것의 연속이었지만) 애초에 그런 경우의 수를 두지 않고 일이 되는 쪽으로만 내가 쏟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 때문이다. 다행히 결과가 나쁜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나빠서는 안됐다. 스스로를 위로할 그걸 감당할 에너지조차 남겨두지 않고 쏟아붓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는 본능적으로 인지부조화이후의 빠른 자기합리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매 단계 갉아먹히듯이 지쳐간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버티는 것이 맞다. 아직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절차로 본다면 거의 다 왔다. 버티는 것은 그래도 걱정하는 만큼 힘든 일은 아니다. 양심, 본능, 자아의 조화가 아직은 잘 작동하는 편이다. 카라반 라이프는 상상만으로 위 세가지 톱니바퀴에 윤활제 역할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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