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에 그만둔 헤드셰프 S의 새 직장에 초대를 받았다. 그는 최근 시카고와 내쉬빌로 미국 출장을 다녀오고 이후에도 클럽 레노베이션 건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터라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기다리고만 있던 찰나에 어떻게 시간이 맞게 됐다.
그간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새 직장은 어떤지, 대우는 괜찮은지, 어떤식으로 운영되고 또 어떤 플랜을 갖고 있는지, 또 간혹가다 서로의 주식 투자 현황도 공유하며 현 시장을 잘 버텨보자며 위로하기도 하고 그렇게 소소하게 연락하며 지내왔지만 직접 방문하고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의 10개월 만이지만 느낌은 2년은 된 것 같다. 그만큼 서로에게 좋은 일 안좋은 일 많은 일이 있었으니 더 궁금했을 터였다.
Blacktown Workers Club의 Executive Chef로 자리를 옮긴 S는 건물 메인 엔트런스에서 나를 맞이해줬다. 이후 클럽 건물 전체를 돌아다니며 7개의 키친과 로딩덕부터 스토어링까지 과정, Sous Chef급 이상의 매니지먼트 롤의 직원들을 소개 해주고 받고 그의 오피스에 들어가 두시간정도 수다를 떨었다. 모든 키친은 brand new Rational oven과 Skope refrigeration equipment로 가득했다. rubber sealing이 망가진 채로 몇 년 째 사용중인 20,000불 언저리의 콤비오븐 두개와 피자 몇개만 구우면 적정온도 유지못하고 말썽을 부리는 -지난 몇년간 수리비로만 새 오븐 가격보다 더 비용을 소모한- 차라리 없는게 나은 피자 오븐 두개를 갖고 있는 지금 나의 키친이 너무 초라해보일 정도였다.
캐주얼다이닝, 카페, 규모에 따라 나뉜 세 펑션룸, 하이엔드급 파인다이닝 등 총 11개의 dining area와 라운지를 하나하나 구경시켜주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미로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로 키친에서 키친으로 이동을 하고 깨끗하고 잘 정돈된 모든 주방, 홀 공간들을 보니 왠지 모를 쾌감까지 느껴진다. 특히 클럽 건물 꼭대기층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블랙타운 시내는 한눈에 보이는 건 물론 저 멀리 있는 시드니타워까지 보이는 멋진 뷰가 펼쳐졌다. 일부 레노 준비중이고 하이엔드급 코스 메뉴로 금, 토 저녁만 오픈할 예정이라고 하여 Price point를 물어보니 $70-$200선으로 계획중이라 하는데 어떻게 선보일지 기대가 크다. 마지막 직원 휴게실에 발을 딛었을 땐 한번 들어와 쉬다간 다음 시프트에 다시 못나갈 거 같을 정도의 안락함이 느껴졌다.
전에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CDP로 내가 Jr Sous chef 트레이닝을 했던 A가 이곳에서 몇명의 Sous chef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 카페를 맡아 관리하고 로스터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S와 함께 내가 갑자기 나타나니 놀라서 5초는 멀뚱멀뚱 쳐다보다 한달음에 뛰어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S가 내가 방문한다고 미리 귀띔하지 않았었나보다. 서로 신나서 또 안부를 주고받고 하니 20분이 훌쩍지났고 할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내가 괜히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이렇게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레 왜그렇게 감사한지.. 코비드 이후로 특히 사람들간의 교류에 있어 물리적인 벽 외에 심리적으로도 많은 장애가 생긴 것이 사실이다. 많은 곳에서 팀웍이라는 것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고 일이란 건 그저 돈벌이 수단일 뿐 목적의식과 단합, 목표를 향한 헌신같은 건 이젠 옛말이 되어버린 지금 지난 황금기를 함께 보냈던 내 헤드셰프와 CDP를 거의 1년만에 다시 만나니 그도 그럴 수 밖에.
뭐라도 먹고 가야하지 않겠냐고 하여 클럽에 타이레스토랑이 있어 혼자 팟키마오 한그릇 먹고 가겠다고 시간 많이 뺐어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한사코 같이 가서 먹자며 레스토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레스토랑 담당 Chef에게 간단한 코스를 부탁하니 S와 나에게 대접할 Entree, main, dessert까지 차례로 내어오는데 두손 모아 사와디캅 연신 인사하고 포크를 들었다. 거창하지 않은 음식이지만 작은 정성과 환대에 고마움을 느껴 참으로 배부르고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새로운 직원 트레이닝 스케줄이 잡혀있어 다시 오피스로 돌아가야 할 수 밖에 없던 그는 처음 나를 맞이했던 건물 입구까지 나를 배웅해줬다. 선물로 사간 Penfold Tawny 30년산 포트와인과 보너스로 이젠 cook보다 office work가 더 많은 그를 위해 다이소에서 산 방석을 선물로 주니 이젠 어느덧 흰머리가 생기고 많은 업무량에 피부도 거칠어진 S의 얼굴에 순수한 함박웃음이 터져나온다. 아쉬움이 진하게 묻은 포옹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 머리와 마음속은 텅빈 차 트렁크와는 다르게 무언가로 꽉 차있었다.
이래도 되는건가 싶을정도로 난 현재의 삶에 적극적으로 타협중이다. 주 38시간(4일) 근무, 코비드 이전과 비교해 절반도 안되는 업무량, 마켓 평균을 약간 상회하는 안정적인 샐러리, 500시간 가까이 남은 연차(8월부터 10월까지 약 8주 휴가 예정), 2-3주에 한번씩 사용하는 그동안 쌓아놨던 lieu, 아무때나 써도 뭐라하지 않는 sick leave, 수년 동안 족쇄처럼 끌고다니던 비자문제는 완전히 해결됐고 스트레스 레벨은 반의 반도 안되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직의 자유가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한인 커뮤니티에서 최근 어떤 글을 읽었다. 부족한 건 없는데 뭔가 허무하네요 라는, 한 회원이 마음 한켠의 공허함을 채울길이 없어 나눈 고민의 내용이었다. 배부른 소리라는 일부 댓글의 반응은 당연히 피할 수 없었을테지만 누구보다 공감되는 글이었다.
S와 함께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와 5년을 넘게 일해서 익히 알고 있다. Head와 Sous의 관계로도 3년을 일해오며 그의 스탠다드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과 노력이 얼마나 고됐는지 아직도 몸이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만큼 일을 즐겼던 때가 없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했을 때도 일중독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때만큼 즐거웠진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즐겁게 일했던 때가 그와 함께 고생했던 때다. 옆에 있는 것 만으로 휴대폰 무선충전하듯 에너지를 주고받았던 관계였다.
전혀 다른 세상 다른 레벨에서 또 도전을 하는 S의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조금은 편안하게, 손에 쥐는 것의 양이 약간 적더라도 여유를 택할 것인가, 어떤 한 선택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는 그 선택을 한 이후에 어떻게 만들어나가냐에 달린 것이지 선택 자체를 놓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순 없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래서 난 후자를 택할 것이고 마음의 자유를 조금은 누려 볼 것이다. 체력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동안 꽉 쥐어왔던 뭔가를 살짝 놓아주는 게 우선이다. 다른걸 잡아보고도 싶고 혹은 아무것도 아닌 맨손으로 있어 보고도 싶다.
무언가로 꽉 차있던 아까 돌아오는 길의 그것은 표현하긴 좀 어렵지만 뭔가 다른 곳을 비춰주는 불빛 같았다. 이런 길도 있고 저런 길도 있으니 한번 가보라는 그런 안내의 조명 같은 것. 행복이란 건 꼭 성취감으로부터만 오는 건 아니라고 누군가 조언하는 듯한 불빛이었다.
S의 오퍼는 간접적으로 잘 거절했지만 오히려 그렇게 편한 관계로 남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예전의 존경하는 마음 그대로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며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기대된다. 머문다는 상대적 박탈감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참 다행스런 일이다. 비교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는 건 내 자신의 건강에도 좋은 현상이다. 그래서 호주에 사는 게 좋다. 내 삶의 질문과 방향이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에서 오는게 아니라 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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